주요프로그램-타이틀

개막작

바람의 소리 風聲 The Message

감독 : 가오 췬슈, 첸 쿠오푸

주연 : 저우신, 장한위, 리빙빙, 황샤오밍

| 중국 | 극 | 2013 | 118분 | 15세

5월 24일 금요일 저녁 7시 30분  군산예술의 전당 야외무대

2009년 제14회 부산국제영화제 폐막작으로 선보였으며중국 박스오피스 정상을 7주 간 차지했던 화제의 대작이다국내 관객들과는 그로부터 4년쯤 지난 2013년에 만났는바국내 소개된 중화권 영화 중 역대 급 호평이 쏟아지기도 했었다중국 영화에 대한 편견을 깼다느니 재미와 교훈이 환상적으로 조화를 이뤘으며 카메라 기술력과 배우들의 연기도 일품이라느니 항일의 역사를 공유하는 아시아인이라면 누구든지 가슴 깊이 저밀 영화라느니 등이었다. “역대 급까진 아니더라도 평컨대 수준 급” 수작인 것만은 인정하지 않을 성 싶다이 영화로규모는 작아도 그 의미·야심 등에서는 국내 그 어느 영화제에 크게 뒤처지지 않을 제2회 금강역사영화제의 포문을 여는 것은 그래서다.

 영화는 일본 정부에서 일을 하며 일본 고위 관계자를 살해하는, ‘유령이라는 중국 스파이를 잡아내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일본군 장교와 감금된 다섯 중국 비밀정부 요원들 사이의 숨 막히는 심리첩보전을 그린다부산영화제 프로그래머 노트에도 실려 있듯그 심리전은 국가를 위한 자기희생이라는 대의명분과 우정과 배신으로 얽힌 개인적인 감정이 교차되며 감동적인 대단원으로 향한다.”

 원작 소설을 토대로 빚어진 영화는 탄탄한 스토리와 손에 땀을 쥐게 하는팽팽한 인물 간의 심리적 갈등 외에도 세련된 촬영 등 미장센몰입력 높은 플롯발군의 연기 등 주목할 만한 덕목들이 즐비하다더러는 낯익고 더러는 낯선 얼굴의 배우들은폐쇄된 공간에서 대사와 표정만으로 얽히고설킨 관계망을 실감 넘치게 소화해낸다특히 중국 대륙 4대 천후로 불리는 저우신과당시만 해도 신예였던 리빙빙은 남성적 전쟁 스릴러에 여성적 감수성을 불어넣는데 모자람 없다중국에서 가장 대중적 사랑을 받는 펑 샤오강 감독(<대지진, 2010>, <집결호, 2007>)의 영화들을 제작해 온 첸 쿠오푸 감독의 대중적 접근 방식과후배 감독 가오 췬슈의 대담한 연출력이 결합해 이뤄낸 성취라는 것이 중평.

 어느 평자도 밝혔듯예의 중국 항일 영화들이 주로 중국일본 간의 2자 대결을 그렸다면 <바람의 소리>는 국민당을 전격적으로 끌어들여, 3자 대결로 나아가는 파격을 감행했다는 점 등도 큰 주목거리다국민당은 일본군의 충실한 부하이자 민족의 배신자로 그려지고국민당의 간부가 억울한 누명을 쓴 채 잔인하게 살해당해도, ‘배신자의 마땅한 죽음‘ 정도로밖에 그려지지 않는 것그 점에서 영화는 류승완 감독의 <군함도>와 연결된다. “가해자 일본 vs. 피해자 한국이라는예의 이분법적 구도를 넘어 우리 내부의 문제로까지 향한그래 얼토당토않은 친일’ 프레임까지 뒤집어쓰면서 크고 작은 비난을 받은 문제적 휴먼 드라마 말이다성격은 판이하게 달라도 영화는한정된 공간과 인원캐릭터들 간의 심리전걸출한 연기 등에서 이재규 감독의 <완벽한 타인>(2018)과 비교될 만도 하다.

전찬일(객원 프로그래머/영화평론가)

폐막작

삼포가는 길

감독 : 이만희

주연 : 김진규, 문숙, 백일섭

| 한국 | 극영화 | 1975 | 95분 | 15세

5월 26일 일요일 저녁 7시 30분  서천군기벌포영화관 야외무대

1970년대 한국영화판을 장식했던 적잖은 ‘호스티스 물’이나, 홍콩 무협물의 아류작쯤으로 치부되곤 하던 여타 싸구려 국산 액션물과는 달라도 너무나 다른 수준을 구현한, 한국 영화사의 빛나는 문제작 중 문제작이다. 영화 미학·예술적 견지에서 1970년대의 그 어떤 영화도 범접하기 힘든 경지를 선취했다. 유현목 감독의 <오발탄>(1961), 이장호의 <바람 불어 좋은 날>(1980), 장선우 감독의 <우묵배미의 사랑>(1990) 등과 더불어 한국영화 리얼리즘의 최고봉으로 손색없다. 황석영의 걸작 동명 단편 소설을 유동훈이 각색해 영화화한, 1970년대의, 아니 한국영화사의 대표적 문예영화요 한국적 로드 무비의 어떤 전형이기도.

30대 초로 보이는 막벌이 노동꾼 영달(백일섭)과, 10년간 ‘큰집’에서 살다가 고향 ‘삼포’를 찾아 가는 중인 중년 남자 정씨(김진규), 수년간의 접대부 생활에 환멸을 느끼고 어느 술집에서 무작정 뛰쳐나온 20대 초의 여인 백화(문숙) 세 밑바닥 인생들이 우연히 만나, 눈 덮인 황량한 벌판을 지나 정씨의 고향 삼포로 향하면서 벌어지는 삶의 애환을 질펀하면서도 설득력 가득히 그렸다.

간혹 어긋나곤 하는 시간적 연속성이 거슬리긴 해도, 길의 기능이나 인물구도 등에서 로드무비로서 <삼포가는 길>의 원형성은 각별한 주목에 값한다. 고향을 잃은 외로운 현대인의 삶의 모습을 설원을 배경으로 감동적으로 묘사하는바, 감독 특유의 영상과 서정성 등이 묵직한 감흥을 만끽시켜준다. 상투적이면서도 더할 나위 없이 효과적인, 당시로선 파격적이었을 입체적 사운드 연출도 흥미롭다. 심심치 않게 나오는 롱 테이크 장면들은 지루하기는커녕 기대 이상의 정서적 울림을 안겨준다. 익스트림 롱 쇼트에서 익스트림 클로즈 업 사이를 유려하게 오가는 다양한 화면 구성은 로드 무비로서 영화의 속성에 완벽히 부응한다.

특히 결말부는 압권이다. 혹자는 좀 더 낭만적이고 감상적인 결말을 원할 수도 있을 터. 하나 원작 소설과 영화의 ‘작가들’은 할리우드로 대변되는 주류 영화의 비현실적·비리얼리즘적 결말을 끝내 거부하고, 지독히도 현실적인 결말을 제시한다. 단언컨대 이 결말은 필자가 겪은 최고의 리얼리즘적 처리로 간주될 만하다.

이처럼 다채로운, 감독의 개성적인 영화 언어들은 1970년대 중반 당시의 평이했던 대다수 국산 영화들과는 판이하게 다른, 확실한 차별성을 확보한다. 흔히 감독의 최고작으로 간주되곤 하는 모더니즘 계열의 대표작 <휴일>(1968)의 시나리오 작가 백결 선생이 “한국영화는 이만희 감독 이전과 이후가 구별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만희 감독 이전에는 영화 고유의 언어를 찾기보다 문학의 지배를 받거나 연극을 빌려왔다. 이만희 감독에 이르러서 비로소 영화 고유의 언어를 찾게 되었다”고 주장한바, 과장이 아니다. 여러모로 필견의 걸작이다.

전찬일(객원 프로그래머/영화평론가)

국화와 단두대

감독 : 제제 다카히사

주연 : 키류 마이, 히가시데 마사히로, 칸이치로, 칸 하나에

| 일본 | 극영화 | 2018 | 189분 | 15세

엉켜 붙어 스모 경기에 한창인 두 여인. 아이를 들쳐 업은 한 여인이 살며시 장막을 들고 경기장을 들여다본다. 경기에 열중해 한 나머지 한 선수의 상의가 찢겨지며 젖가슴이 드러나고, 관중들은 흥분한다. 그 때 현기증이 일어나듯 관동대지진의 여진으로 하늘과 땅이 흔들리고, 세워 놓은 깃대가 넘어지며 경기장은 혼란에 빠진다. 이 장면들을 장지문에 구멍을 뚫어 몰래 들여다보듯 어둠 속에서 관객들에게 살며시 비춰주며, 영화는 시작된다.

빈곤과 대지진 등 불온의 기운이 그득한 일본에는 ‘여성 스모’가 등장해 그나마 사람들에게 웃음을 더해주고 있다. 여성씨름단의 하나인 ‘타마이와 흥행’이 도쿄 근교에 찾아오고, 남편의 폭력에 시달리던 키쿠(花菊)는 여성씨름단을 동경하며 탈출해 씨름판에 신인 선수로 뛰어든다.

일본에 억압받던 조선인 유녀출신의 토카치, 일본인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오키나와 출신 등 갖가지 사연을 담은 여인들이 모여 있고, 스스로의 힘으로 일어서보겠다는 결심으로 혹독한 연습을 견디며 씨름에 열중한다. 이들이 모래판에 오르기로 한 날 씨름장을 찾은 테츠와 다이 등 젊은 아나키스트들은 격차 없는 평등한 사회를 표방하는 이들은 여성 씨름선수들에게 매료된다.

쿠리하라 야스시(栗原 康)의 소설 <국화와 기요틴을 한다면 지금밖에 없어, 언제나 지금밖에 없어(菊とギロチン やるならいましかねぇ、いつだっていましかねぇ)>를 원작으로 한 이 영화는 관동대지진 직후, 당시 여성 스모선수들과 아나키스트 단체 ‘키요틴사(ギロチン社)’가 만났더라면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에서 시작됐다.

‘음란하다’거나 ‘여성이 스모판에 올라서면 신이 노한다’며 여성스모를 멸시했던 당시에 당당히 스모를 통해 성공하겠다고 나선 여성들과 사회 변혁을 꿈꾸며 저항하던 아나키스트는 모두가 사회적 약자이며, 이들이 바라 본 세상, 그리고 이들이 꿈꾸며 바꾸려 노력하는 세상을 이 작품을 통해 들려주고 있다.

<국화와 단두대>는 세 시간의 긴 상영 시간이 결코 길다고 느껴지지 않을 영화다. 영화를 보다보면 등장인물들의 섬세한 묘사에 동질감을 느끼게 되고, 이들이 극복해 가는 세상을 흥미진진하게 들여다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영화의 소재로 사용된 스모에 대해 알게 되는 묘미를 보너스처럼 선사받게 될 것이다.

김군

감독 : 강상우

주연 : 김군, 주옥, 양동남, 지만원

| 한국 | 다큐멘터리| 2018| 85분 | 12세

멀게는 이은, 장동홍, 장윤현(공동) 감독의 <오! 꿈의 나라>(1989)부터 가까이는 박기복 감독의 <임을 위한 행진곡>(2018)에 이르기까지, 5‧18 광주항쟁을 직‧간접적으로 다룬 영화들은 15편쯤 되는 것으로 전해진다. 문득, ‘광주민주화운동 영화’가 그렇게나 많나, 싶은 의문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대중적 영향력 면에서 자신 있게 내세울 수 있을 광주항쟁 영화들은 고작 2편에 지나지 않기에 하는 말이다. <택시운전사>(장훈, 2017)와 <화려한 휴가>(김지훈, 2007)다.

지난해 제23회 부산국제영화제를 통해 한 편의 주목할 만한 광주항쟁 영화가 첫선을 보였고, 올해 5월 23일 일반 관객과 만난다. 저예산 독립 다큐멘터리 <김군>이다. 모든 건 항쟁 당시 찍혔던 한 장의 사진에서 출발했다. 영화는 “2018년 현재 5·18을 둘러싼 논쟁의 중심에 서 있는 무장 시민군의 행방을 추적한다.” 그 추적을 통해 영화는 “한 이름 없는 청년이 어떻게 항쟁에 참여하게 되었고, 왜 총을 들었으며, 이후에 어디로 사라졌는가에 대한 답을” 제시하려 한다. 꽤 정교한 편집, 음악 효과 등 공들인 영화적 기교들을 동원해가면서. 그 기교들은 이 문제적 다큐를 돋보이게 하는 미덕들이면서 동시에, 중립적‧객관적이고자 하는 영화의 의도를 적잖이 훼손시키는 흠결일 수도 있다.

‘김군’으로 일컬어지는 청년은 특정인이라기보다는, 광주항쟁의 모든 주역들을 가리키는 보편적 호칭임은 두 말할 나위 없다. 그런 청년을 보수논객 지만원은 600명에 달하는 북한특수군 ‘광수들’ 중 그 첫 번째인 ‘제1광수’라고 명명한다. 그 주장이 얼마나 터무니없는가는 자명하다. 하지만 영화는 그를 단죄하진 않으려, 무던히 애쓴다. 관객들 중에는 ‘태극기 부대’로 통칭되는 ‘지만원들’도 적잖을 터서일까. 그런 영화의 태도는 신중한 것일까, 모호한 것일까? 아니면 비겁한 것일까? 정치적 입장 없는 역사 다큐란 존재할 수 없기에 던져보는 물음이다. 모든 판단은 관객들의 몫임은 물론이다.

전찬일(객원 프로그래머/영화평론가)

항거 : 유관순 이야기

감독 : 조민호

주연 : 고아성, 김새벽, 김예은, 정하담

| 한국 | 극영화 | 2019 | 105분 | 12세

1919년 3.1만세운동 이후 3평도 채 되지 않는 당시 서대문 감옥, 즉 서대문형무소 8호실 안, 비록 몸은 아니었을지언정 영혼만은 누구보다 자유로웠던 유관순 열사와, 그녀의 동지들이던 서른 명에 달했던 8호실 여성들의 1년간을 극화한 실화성 팩션(Faction) 드라마다. 유관순의 삶을 고스란히 담아내고 싶었던 감독과 제작진은 “역사적 사실과 자문 등을 통해 사실에 입각한 실제적 인물 유관순을 ‘정직하게’ 스크린에 담아내려고 노력했다”는데 다름 아닌 그 ‘정직함’이 영화의 큰 덕목이다.

<항거:유관순 이야기>는 그런 부류의 영화들이 자칫 빠져들기 십상인 이러저런 함정들에 빠져들지 않는다. 일정 정도는 교훈적이되, 계몽적으로 새지 않는다. 일말의 감상성을 엿보이되, 최루로 치닫지 않는다. 선동적일 법도 하건만, 그런 법이 거의 없다. 크고 작은 사실성을 확보하기 위해 부득이 택하지 않을 수 없을 선정성의 길을 걷지도 않는다. 심지어 백현진과 짝을 이룬 ‘어어부 프로젝트’의 장영규 등이 음악을 연출했건만, 음악 효과로 관객의 감상을 배가시키거나 조종조차 않는다. 그러니 어찌 정직하다, 평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여러모로 영화는 이준익 감독의 <동주>(2016)와 닮은꼴이다.

영화의 으뜸 미덕은 하지만, 가히 ‘재탄생’이라 평할 만한, 압도적인 고아성의 연기와 성격화(Characterization)다. 고아성은 그 낱말이 내포하고 있는 함의 그대로 유관순의 현현(顯現)이다. 그 때문이다. 고아성의 연기를 지켜보면서 어느 지점에서는 마치 유관순을 목격하는 것 같은 착각 아닌 착각을 일으켰던 까닭은. 동시에 그는 유관순이라는 역사적 캐릭터를 소화해내야 한다는 사실을 단 한순간도 잊지 않는, 소위 변증법적 연기를 펼친다. 유관순이라는 인물을 체현하면서 동시에 시종 극중 배역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것. 영화를 보는 내내, 고아성은 어쩌면 이 역할을 구현하기 위해 배우가 된 것은 아닐까, 싶은 의문이 들었던 것도 그래서였다.

전찬일(객원 프로그래머/영화평론가)

아메리카 타운

감독 : 전수일

주연 : 김단율, 임채영, 서갑숙

| 한국 | 극영화 | 2017 | 94분 | 15세

2015년 11월 7일 방송된 SBS ‘그것이 알고 싶다’의 부제는 ‘꽃들에 관한 인권 보고서 2부 – 몽키 하우스와 비밀의 방’이었다. 방송은 1960년대부터 이어진 주한미군들을 위한 성매매 시설 건설에 정부가 개입했다는 사실을 폭로했다. ‘몽키 하우스’의 원래 이름은 ‘낙검자 수용소’. 과거 미군기지 일대에서 성매매를 하던 여성 중 성병에 감염됐거나, 감염됐다고 추정된 여성들이 수감돼 치료를 받던 곳이었다. 주한 미군으로부터 벌어들이는 달러를 위해 정부가 나서서 직접 성병관리를 지시했고, 일주일에 두 번씩 성매매 여성의 성병 검사를 하면서 낙검자 수용소를 운영했다. 당시 미군들은 이곳에서 탈출하려는 여성들의 모습이 ‘원숭이’ 같다며 ‘몽키 하우스’로 부른 것으로 알려졌다…(허핑턴포스트코리아, 참고‧인용).

군산에서 올 로케로 찍은 <아메리카 타운>은 다름 아닌 그 ‘몽키 하우스’를 무대로 펼쳐진다. 해외에 가면 ‘코리아 타운’도 있고, ‘차이나 타운’도 있는데, ‘아메리카 타운’이라? 군산의 시골 마을을 개조해 조성했던, 살 집과 술집, 그 외 각종 편의시설을 만들어, ‘미군 위안부’라 불렸던 성매매 여성들을 불러들여 주한 미군이 달러를 쓰게 만들었던, 일종의 계획형 신도시라는데?

<아메리카 타운>은 ‘팩션’ 형식으로 극화한, 상기 방송 프로그램의 영화 버전이다. 1980년대 군산 기지촌의 사진관 집 아들 상국(김단율 분)과, 그 15살 소년에게 첫사랑의 열병에 빠지게 하는 기지촌 여성 영림(임채영) 등이 주인공들이다. 영화는 소년의 첫사랑, 첫 경험 등의 통과제의를 통해 미군 위안부 여성들이 겪어야 했던 상처와 아픔을 전한다. 그렇다고 달콤쌉싸름한 그 무엇을 기대해선 낭패를 맛보기 십상이다. 영화를 지켜보기란 편치 않다. 영화 미학적 판단 이전에, 숱한 국가폭력 중 한 사례를 마주하는 씁쓸한 체험이어서다. 문득 깨닫는다. 우리는 그런 국가폭력들을 너무나도 무심코 받아들인 채, 별다른 거부감 없이 살아왔다는 사실을. 부끄럽게도.

전찬일(객원 프로그래머/영화평론가)

말모이

감독 : 엄유나

주연 : 유해진, 윤계상

| 한국 | 극영화 | 2018 | 135분 | 12세

이 영화를 통해 처음 접하게 된 낱말 뜻부터 보자. ‘말모이’! 주시경 선생이 한일합병 초기인 1911년에 착수했으나, 선생의 죽음으로 미완성으로 남은 최초의 국어사전 원고를 일컫는 말. 사전을 뜻하는 순우리말이란다. 또한 영화 속에서 조선어학회가 사전을 만들기 위해 일제의 감시를 피해 전국의 우리말을 모았던 ‘비밀 작전’의 명칭이기도.

영화는 이름조차 일본식으로 바꾸지 않으면 안 되었던 일제식민기, 우리말 우리글은 과연 누가, 어떻게 지켰을까, 라는 의문에서 시작되었다. 비밀리에 우리말을 전국 각지에서 모아 조선말 사전을 만들려고 했다는 이유로 대거 옥고를 치렀던, 1942년 10월부터 1945년 1월까지 의 ‘조선어학회’ 사건을 바탕으로, ‘말모이’에 함께 한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극화했다.

극장에서 해고된 후 아들 학비 때문에 가방을 훔치다 실패한 판수(유해진 분), 조선어학회 대표인 가방 주인 정환(윤계상), 조선어학회의 큰 어른 조갑윤 선생(김홍파), 술을 사랑하고 사람은 더 사랑하는 시인 임동익(우현), 학회 기관지인 ‘한글’ 기자인 박훈(김태훈), 학회 비밀 서고와 사무실이 있는 ‘문당책방’의 운영 책임자인 구자영(김선영), 항일에서 친일로 변절한 정환의 아버지 류완택 (송영창), ‘말모이’ 탄압에 앞장서는 일본 경찰 우에다(허성태) 등이다. 가히 인상적 캐릭터들의 성찬이요, 스타는 아닐지언정 좋은 연기자들의 향연이라 할 만하다.

지나치게 계몽적인 건 아닐까, 싶은 비판이 없진 않겠으나, 소재·주제의 성격상 그 정도의 계몽성·교훈성은 감수할 수밖에 없을 터. 이 영화를 통해 ‘말모이’라는 아름다운 우리말도 알게 되고, 조선어학회 사건도 새삼 환기하지 않았는가. <택시운전사>의 기획·제작자(박은경)와 각본가(엄유나)의 그 다음 선택작이란 점에서도 영화는 눈길을 끌 자격 충분하다.

 

전찬일(객원 프로그래머/영화평론가)

군함도 감독판

감독 : 류승완

주연 : 황정민, 소지섭, 송중기, 이정현

| 한국 | 극영화 | 2017 | 151분 | 15세

일본 나가사키 현 나가사키 항에서 남서쪽 약 18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섬 하시마(端島), 군함도의 역사적 사실에 ‘탈출’이라는 허구적 상상력을 가미한 ‘팩션 영화’다. 지옥도로 불리기도 한 군함도는 “남북으로 480m, 동서로 160m, 축구장 2개만한 크기의 인공 섬으로 섬 전체가 탄광이며 갱도는 해저 1,000m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태평양 전쟁 이후 1940년부터 1945년까지 수많은 조선인들이 강제 징용”을 당했다는데, 영화는 다른 이유로 군함도에 끌려오게 된 평범한 이들이 나름의 방식으로 생존해가는 과정을, 때론 익살스럽게 때론 비장하게, 페이소스 베인 휴먼 액션 드라마로 펼쳐 보인다. “끌려온 이유와 살아남는 방식은 달랐지만, 군함도라는 지옥에서 살고자 하는 마음만은 같았던 조선인들의 탈출기는 인물 각자의 사연이 더해져 가슴 아픈 감동을 만든다.”

일찍이 평했듯 <군함도>는 단언컨대 가시적이자 동시에 비가시적 덕목들이 즐비한 수작이다. 이미지와 사운드의 몽타주, 플롯의 완급 조절, 결정적 한방의 적절한 배치 등에서 최상의 영화적 수준을 구현한 ‘웰-메이드 시대극’이랄까. 영화는 사실과 허구 사이의 구분을 무의미하게 만들며, ‘포스트-팩션 영화’의 어떤 가능성까지 제시한다. 부분적 어색함에도 불구, 역사적 사실에 주눅 들지 않고 군함도라는 거대 담론을 개인화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그럴 법한데도 신파를 거부하며, 관객들에게 눈물을 강요하지 않는다. 영화에서 혹 일말의 건조함이 느껴진다면 그 때문일 공산이 크다. <베테랑>(2015)이나 <베를린>(2013) 같은 전작들과는 달리, 그 간의 류승완과는 다른 비-대중적 화법으로 영화 속 가슴 아린 사건·사연들에 일정한 거리감까지 부여한다. 이른바 ‘애국 코드’에 전혀 호소하지 않고, 관객들에게 반성적 성찰을 요구하기도 한다. 이번에 선보이는 <군함도>는 기존 개봉 버전보다 20분가량 더 긴 감독판이다.

 

전찬일(객원 프로그래머/영화평론가)

오빠 생각

감독 : 이한

주연 : 임시완, 정준원, 이레, 고아성, 이희준

| 한국 | 극영화 | 2015 | 123분 | 12세

뜸북뜸북 뜸북새 논에서 울고/ 뻐꾹뻐꾹 뻐꾹새 숲에서 울제/ 우리오빠 말 타고 서울 가시면/ 비단구두 사가지고 오신다더니; 기럭기럭 기러기 북에서 오고/ 귀뚤귀뚤 귀뚜라미 슬피 울건만/ 서울 가신 오빠는 소식도 없고/ 나뭇잎만 우수수 떨어집니다.

초등학교 시절 음악 시간에 심심치 않게 부르곤 했던 노래, ‘오빠생각’이다. 영화 <오빠생각>은 “한국전쟁 당시 실존했던 어린이 합창단을 모티브로, 모든 것을 잃어버린 전쟁터 한가운데서 시작된 작은 노래의 위대한 기적을 그린”, 재미와 감동, 교훈을 두루 겸비한 희망의 휴먼 드라마다. 기적의 주인공은 전쟁으로 인해 가족, 동료 모두 잃은 군인 한상렬(임시완 분). 전출 명령을 받아 마지못해 머물게 된 부대 안에서 고아들을 만나고, 그들의 해맑은 모습에 점차 마음 문을 열게 되는 그는, 자원봉사자 박주미(고아성) 선생과 함께 어린이 합창단을 조직해 노래를 가르친다. 그들의 노래는 언제 목숨을 잃을지 모르는 전쟁 한복판에 처해 있는 많은 이들의 마음을 움직이기 시작한다….

인간은 내일 지구가 멸망한다 할지라도 웃을 수 있는 존재라지 않는가. 주제곡 ‘오빠생각’을 비롯해 ‘고향의 봄’, ‘나물 캐는 처녀’ 등 우리 노래들과, ‘대니보이’, ‘애니로리’, ‘즐거운 나의 집’, 그리고 체코 민요 번안곡 ‘목장길 따라’를 감독이 제목과 가사를 바꿔 만들었다는 ‘친구와 함께’ 등 외국 곡들을 감상하는 것만으로도 이 전쟁-비극에서 기대 이상의 감흥을 맛 볼 수 있다. 시대별 합창과 가곡, 동요를 포함해 작곡가에 대한 자료들을 찾아가며, 실제 1950년대에 많이 불린 노래들 중 향수, 고향, 그리움의 감정을 담아낸 곡들이라고. 상렬과 주미 등 성인 캐릭터들과 동심들이 한데 어울려 빚어내는 ‘선한 드라마’의 맛은 어떤가. 악역 갈고리 캐릭터(이희준)로 인한 극적 긴장도 자칫 단조로워질 수 있을 이 ‘착한 영화’에 입체성을 부여해준다.

전찬일(객원 프로그래머/영화평론가)

해어화

감독 : 박흥식

주연 : 한효주, 천우희, 유연석

| 한국 | 극영화 | 2015 | 120분 | 15세

지난해 1월 쥐도 새도 모르게 조용히 상영됐던 다큐멘터리 <기생 : 꽃의 고백>에 의하면, 20세기 초 모던의 꽃으로 문화예술계를 주름잡으며 화려하게 피었다가 소리 없이 사라져간 여성 예술가들이 있었다. 그들은 해어화(解語花), ‘말을 이해하는 꽃’ 기생이라 불렸다. 그들은 외면적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연기, 무용, 악기 연주, 예술에 대한 식견까지 갖춘 문화엘리트이자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신문물을 받아들인 선구자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삶은 철저히 감춰져야만 했다….

<해어화>는 그 흥미진진한 다큐의 극영화 버전이라 할 수 있다. 1943년 비운의 시대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가수를 꿈꾸는 마지막 기생들의 숨겨진 이야기. 영화는 상기 다큐의 주장이 결코 거짓이거나 과장이 아님을 여실히 증거한다. 영화는 잔치나 술자리에서 노래나 춤 등으로 멋스럽게 흥을 돋우는 일을 직업으로 삼는 여인인 기생보다는 예인, 즉 예술가적 면모에 초점을 맞춘다. 영화가 중심인물들의 육체적·물질적 관계보다는 정신적·심리적 측면에 무게중심을 두는 건 무엇보다 그 때문이다.

마지막 남은 경성 제일의 기생 학교 ‘대성권번’. 빼어난 미모와 탁월한 창으로 최고의 예인으로 불리는 소율(한효주 분)과 심금을 울리는 목소리를 가진 연희(천우희)는 선생 산월(장영남)의 총애와 동기들의 부러움을 받는 둘도 없는 단짝 친구다. 소율과 윤희 사이에 당대 최고 작곡가 윤우(유연석)가 나타나며 삼각관계가 조성되고, 나아가 소율의 환심을 사려는 경무국장(박성웅)이 끼어들면서 4각관계로 발전한다.

이렇듯 영화는, “일본은 물론 서양과 중국으로부터 받아들인 근대문물과 조선 고유의 문화가 혼재된 시기였다”던 1940년대 경성의 시대상과, 그 시대를 살았던 몇몇 개인들의 사적 드라마를 드라마틱하게 펼쳐 보인다. 그 드라마를 지켜보는 맛이 얕지 않다. 조선 민중들의 마음을 어루만지기 위해 윤우가 작곡한 노래 ‘조선의 마음’이나 ‘사랑 거즛말이’는 내가 기억하는, 21세기 한국영화 최고 OST다. 한효주가 직접 소화했다는 ‘일각이’, ‘일소백미생이’ 등 정가도 귀를 잡아끌기 부족함 없다. 강추하고픈 문제적 멜로 영화다.

 

전찬일(객원 프로그래머/영화평론가)

사도

감독 : 이준익

주연 : 송강호, 유아인, 문근영, 전혜진

| 한국 | 극영화 | 2014 | 125분 | 12세

조선후기 제21대 왕이었던 영조는 1694년부터 1776년까지 83년을 살다 간, 조선왕조 최장수왕이었다. 재위 기간도 무려 52년(1724~1776)이었다. 그는 조선왕조의 고질적 병폐였던 당쟁의 폐단을 근절하기 위해 탕평책을 펼쳤고, 애민주의에 근거한 올곧은 치정으로 백성들의 고통을 덜어 주려했으며, 여러 가지 제도의 정비‧혁파로 조선 후기 사회 제도의 안정을 꾀하는 등 적잖은 치적을 남긴 선군으로 평해진다. 하지만 자신을 왕으로 만들어준 노론에 무게중심을 실으면서 외척 세력을 키웠고 그 결과 탕평책을 미완에 그치게 했으며, 기득권층 논리에 밀려 근본적인 제도 개혁을 이룩하지 못한 오점들을 남긴 것도 사실이었다. 더욱이 그는 재위 내내 경종 독살설에서 벗어나려 발버둥 쳐야했는데, 정치적 이해관계 속에서 아들을 죽이고, 그로 인한 죄의식에 시달려야만 했다. 결국 그가 오래 산 탓에 친아들을 죽이게 된 꼴이었던 것. 속성상 대권은 두 사람이 나누어 가질 수는 없기 때문(포털 다음의 『조선국왕전』, 이성무, 청아출판사 참고‧인용).

<사도>는 영조와 사도세자를 넘어 아버지와 아들이란 인간 보편의 그 오이디푸스적 비극을, 더러는 코믹 터치를 가미하나, 비장한 톤과 매너로 극화했다. 영화는 영조와 사도 두 중심인물 중 어느 한쪽 편을 들지 않는다. 딱히 권력을 향한 비판‧비난의 칼날을 들이대지도 않는다. 최대한 균형감을 유지하면서, 두 중심인물의 인간적 면모를 드러내는데 집중한다. 그 집중력으로 인해, 실제 역사에서는 나름 중요했던 혜경궁(문근영 분), 인원황후(김해숙), 홍봉한(박원상) 등 그 주변인물들이 거의 지워지다시피 하는 아쉬움이 발생한다. 더욱이 연출을 21세기 한국 역사 영화의 대명사가 된 이준익이, 아버지와 아들 역을 송강호, 유아인이 맡았으니, 영화에 남다른 화제가 몰리는 건 당연했다. 2015년 제35회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최우수작품상, 각본상, 음악상 등의 비평적 개가와, 620여 만의 흥행 성적은 그 화제성의 대가였다.

 

 

전찬일(객원 프로그래머/영화평론가)

동학, 수운 최제우

감독 : 박영철

주연 : 박성준, 송경의, 정기선, Liam Yun

| 한국 | 극영화 | 2011 | 106분 | 15세

2011년 제16회 부산국제영화제 뉴커런츠 부문에 공식 초청됐던, 저예산 독립영화다. 자신의 소신‧신념을 지키기 위해 지독한 소외를 넘어 죽음마저 마다하지 않았던, 조선 말기의 종교사상가이자 동학 창시자 수운 최제우(1824~1864)의 마지막 생애를 그린 발견의 휴먼 드라마다. 당시 한국영화 프로그래머로 프로그램 노트에 적었듯, 이 영화와 조우하기 전까지만 해도 저예산 스크린 사극은 상상조차 한 적이 없다. TV건 영화건 사극은 으레 ‘큰돈’을 들여야만 제작‧연출이 가능할 거라는 고정관념 탓이었다.

<동학, 수운 최제우>는 찰리 채플린을 꿈꿨던 게 틀림없었을, 그 당시 50대 중반의 ‘중견 신예’가 고작 7천만 원여의 빚으로 빚어낸 문제적 시대극이다. 감독은 제작을 포함해 시나리오, 의상, 음악 연출 등을 손수 담당했다. 각별한 주목을 요하는 건, 소재, 장르 등 외연적 요소들만은 아니다. 세르게이 M. 에인슈테인적 ‘내적 몽타주’가 돋보이는 정치한 화면 구도,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를 연상시키는 정중동의 극적 리듬과 미장센, 영화적 ‘내공’을 짐작케 하는 적잖은 시‧청각적 오마주들, 비주얼 못잖게 인상적인, 음악을 포함한 사운드 효과 등 덕목들은 새삼 “영화란 무엇인가?”란 근원적 질문을 던지게 한다. 칼 테오도르 드라이어의 걸작 무성 영화 <잔 다르크의 수난>(1928)과 비교하며 감상하는 맛도 작진 않을 듯.

마침 지난 4월 하순부터 48부작으로 SBS 금, 토 밤 드라마 <녹두꽃>이 선보이고 있어, 새삼 영화에 더 큰 눈길이 향할 법도 하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의 소용돌이 와중에 농민군과 토벌대로 갈라져 싸워야 했던 이복형제의 파란만장한 휴먼 스토리. 사상으로서 동학을 종교 천도교로까지 ‘격상’시킨 동학 3대 교주 송병희가 100주년을 맞이한 3.1혁명의 주역이었던지라, 영화를 향한 관심이 더 남다를 것도 같고.

 

전찬일(객원 프로그래머/영화평론가)

비용의 아내 - 버찌와 민들레

감독 : 네기시 기치타로

주연 : 마츠 다카코, 아사노 타다노부, 히로스에 료코, 츠카부키 사토시

| 일본 | 극영화 | 2009 | 114분 | 15세

1946년, 패전으로 온천지에 어두운 기운이 가득한 일본. 가쁜 숨을 헐떡이며 어두운 밤길을 달리는 사나이. 온기라곤 하나 없는 냉골의 방에 도착해 책상에서 꺼내든 단도. 아이를 병원에 데려갈 돈 조차 없는 아내 사치는 인기척에 깨어 오랜만에 찾아온 오오타니에게 안부를 묻는다.

하지만 오오타니는 집까지 쫓아온 노부부에게 칼을 휘두르며 달아나버리고, 아내 사치가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노부부가 주인인 단골가게에서 그가 돈을 빼앗아 달아난 것이다. 결국 오오타니의 빚을 탕감하기 위해 사치는 술집에서 일하기 시작한다.

과연 죽음이란 어떤 것일까? 죽는 것도 두렵고 사는 것도 두려운, 태어날 때부터 죽음만을 생각한 사내이지만 그는 죽을 수도 없었다. 고고한 천재작가로서 새로운 경지를 개척했다고 평가받는 천재적인 작가 오오타니 죠지는 항상 죽음을 염두에 두고 삶을 비관하며 살아간다.

아내가 아닌 다른 여성과 동반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던 오오타니는 원작 <비용의 처(ヴィヨンの妻)>의 작가 다자이 오사무(太宰治)의 모습이고, 이 원작 소설 또한 다자이 오사무의 자전적 소설로 그의 삶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이 작품은 잿빛으로 음울함이 가득한 패전국의 도시 도쿄의 모습을 낮은 채도의 화면과 카메라의 위치를 아래로 내려 낮은 시선에서 이야기를 들려주며 당시의 어둡고 무거운 사람들의 마음을 엿볼 수 있게 해준다. 또한 이러한 장치는 관람하는 모든 이를 1940년대 도쿄의 한가운데로 데려가 당시의 분위기에 흠뻑 빠질 수 있도록 장치해 놓았다.

마츠 타카코(松たか子), 아사노 타다노부(浅野忠信), 츠마부키 사토시(妻夫木聡), 히로스예 료코(広末涼子). 이들 네 배우들의 이름을 들여다보면 패전 후 일본의 음울함을 담기에는 지나치게 화려하고 활기 넘치는 배우들의 조합은 아닐까 의아해지기도 한다. 하지만 이들이 펼쳐내는 연기는 보석처럼 빛나고 원작의 내음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사치’를 연기한 마츠 타카코를 보다 보면 그 동안 아름답다고만 생각했던 그녀가 어느새 성숙한 여인으로 우리 곁에 다가와 있고, 뻔뻔한 듯 자신의 삶의 무게를 이겨내지 못하는 천재작가 ‘오오타니’의 아사노 타다노부를 보며 안타까움을 감출 수 없게 된다. 여인에 대한 욕망을 감추지 못하는 생기발랄한 젊은이 ‘오카다’의 츠마부키 사토시, 오오타니에게 매료되어 위험한 사랑을 이어가는 ‘아키코’의 히로스에 료코는 여전히 매력적이다.

정지욱(영화평론가)

황산벌

감독 : 이준익

주연 : 박중훈, 정진영, 이문식

| 한국 | 극영화 | 2003 | 104분 | 15세

채 20년도 되지 않은 21세기 한국영화사에서 가장 중요한 한 해를 꼽으라면 과연 어느 해일까? 별다른 주저 없이 그 답은 2003년일 터. 영화 미학‧예술적으로나 산업적으로나, 특히 장르적으로나 그 해에 ‘한국영화의 어떤 대폭발’이 일어났기 때문. 무엇보다 한국 스릴러 영화의 변곡점이었던 <살인의 추억>(봉준호)과, 2004 칸영화제 심사위원 대상을 거머쥐면서 국제적 관점에서 한국영화를 ‘그 이전’과 ‘그 이후’로 나뉘게 한 <올드 보이>(박찬욱)가 흥행과 비평 양면에서 공히 기념비적 대성공을 일궈냈다. 그들 외에도 여전히 국산 공포 영화 역대 흥행 정상작인 <장화, 홍련>(김지운), 한국영화사의 독보적 ‘B급 작가 영화’ <지구를 지켜라>(장준환), 현재 총18편에 달하는 ‘한국 천만 영화’ 그 첫 탄인 <실미도>(강우석)가 선보였다. 그리고 또 하나의 한국영화사의 문제작이 있다. 이준익 감독의 <황산벌>이다. 1960년대를 풍미했던 한국산 ‘스크린 사극’ 부활의 결정적 계기!

“고구려, 신라, 백제 3국이 지금과 같은 사투리를 사용했다는 가정 아래 신라와 백제의 결전인 황산벌 전투를 코믹하게 그리고 있다. 그동안 역사물에서는 표준어를 써온 데 비해 이 영화에서는 당시 황산벌, 지금의 충남 연산(連山) 벌판 싸움에서 충청도, 전라도 사투리를 사용하고 있다.”(이하 네이버 지식백과,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한국영화 1001』 간접 인용) 지나치게 빈번하게 쓰여 영화의 성격을 결정지어버린 듯한 낱말 ‘거시기’가 대표적이다. “거시기라는 배역도 있고 ‘거시기’ 작전도 있다.”

이 영화의 성공이 없었다면, 데뷔작 <키드캅>(1993)의 대참패로 차기작을 내는데 10년이나 바쳐야 했던 이준익 감독도, 그의 <왕의 남자>(2005)도, <사도>(2015)도, <동주>(2016)도, 나아가 21세기 한국 역사영화의 유행도 부재했거나 지연됐을 공산이 크다. 영화적 수준에 대한 평가 여부를 떠나, <황산벌>의 영화사적 의의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 판단은 세월이 가면서 점점 더 공고해지고 있다. 그 의의를 다시금 확인해보는 건 어떨까.

 

전찬일(객원 프로그래머/영화평론가)

워커힐에서 만납시다

감독 : 한형모

주연 : 트위스트 김, 서영춘, 남정임

| 한국 | 극영화 | 1966 | 100분 | 

해외여행이 자유롭지 못했던 1960년대. 워커힐은 한국인에게 드림랜드! 워커힐은 특히 신성일 엄앵란 부부의 결혼식(1964년) 장소로 알려지면서 더욱 유명해졌다. ‘워커힐에서 만납시다’(1967년)는 영화 제목이기도 하지만, 당시 이미 유명한 여행상품의 광고카피이다. 영화 <워커힐에서 만납시다>는 당시 워커힐에 한 번이라도 가본 상위 1%가 아닌, 한 번이라도 가보고 싶은 대한민국의 99%를 위한 영화.

<워커힐에서 만납시다>(1967)는 시골서 올라온 처녀가 톱가수가 된다는 ‘신데렐라 스토리’에 근거한다. 당대 트로이카 여배우의 한 사람인 남정임을 주인공으로 해서 인기 코미디 배우(서영춘, 구봉서)를 내세운다. 코미디 영화를 지향하지만, 그 안에는 우리네 근현대사의 단면을 보여준다. 한국전쟁으로 인한 가족과의 생이별, 남의 집 살림살이(식모)를 해야만 했던 시골처녀, 서울의 교통규칙 등을 몰라서 파출소에서 하룻밤 신세를 져야만 하는 시골출신의 ‘웃픈’ 상경(上京) 에피소드가 담겨있다.

이 영화의 주목할 점은 남성 주인공이다. 많은 다른 영화와는 다르게 돈 없고 ‘빽’ 없고 잘생기지 않은 남성이 주인공이다. 인물과 재력을 갖추지 못했지만, 오직 진정성만이 재산인 남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운다. 한국영화에서 남정임의 짝(상대역)은 신성일이나 김진규만을 떠올리는 현실에서, 트위스트 김을 상대역으로 설정한 것도 당대의 영화로선 매우 특이한 캐스팅.

<워커힐에서 만납시다>란 영화의 최고 가치는 당대 톱 가수의 노래를 ‘풀 버전’으로 감상할 수 있다는 점. 한국에서 ‘음악영화’를 표방한 작품은 적지 않으나, 한 가수의 유명 레퍼토리가 그래도 닮긴 영화는 <워커힐에서 만납시다>가 현재로선 유일아다. 특히 너무도 한국인에게 유명해서 번안 가요인 것조차 모르는 현미의 ‘밤안개’와 이 영화를 통해서 유명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흑산도 아가씨’를 부르는 이미자의 검은색 반짝이 한복 또한 매우 인상적이다.

그녀들의 젊은 시절의 노래와 함께, 김준, 김상국, 유주용, 윤항기, 위키리(이한필) 등 남성가수의 올드 팝과 번안 가요를 들을 수 있다. 한국어 노래와 영어 노래가 공존했던 워커힐이라는 공간의 레퍼토리를 간접적으로 경험하게 된다.

윤중강(평론가)